종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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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즈음부터 손가락 관절에 이상을 느끼게 되면서 가능하면 컴퓨터 자판을 덜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관절염이라는데, 의사 말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약도 없으니, 많이 아프면 진통제 먹으라고 했다. 한번은 진통제를 처방받아 왔는데, 약병에 써 있는 무시무시한 부작용들을 읽고는 정말 꼭 필요할 만큼, 그러니까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플 때가 아니면 먹지 않기로 했다.

손가락 덜 쓰기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 종이에 일기 쓰기다. 전에는 모든 종류의 글쓰기를 컴퓨터 자판으로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종이에 써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컴퓨터에 쓸 때는 아무 거나 생각나는대로 적었다가 후에 정리하면 된다는 편한 생각이었는데, 빈 공간이 가득한 종이를 펼치고 펜을 대려니 낯선 기분이었다.

그냥 그날 그날의 소사나 소회나 적어 놓아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약간 중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계속 뭔가를 적어놓는다. 하는 일이 혼자 자리에 앉아 뭔가를 찾아보거나, 직접 해보거나, 아니면 더 자세히 읽어보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대화를 통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쓸어 보내기도 어렵다. 그러다보니 주절 주절 종이에라도 적게 되나보다.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이 생겨도 적고, 기쁜 일이 생겨도 적는다.

조금 더 열심히 적게 된 데에는 한 가지 계기가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에서 뵙고 언제나처럼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 짧은 대화를 나눴나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는지 일기장에 그 때의 대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얼마가 지나서였을까 일기장을 뒤적이다 그 날의 일기를 발견했는데,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머리 속에는 정말 지우개를 깨끗이 지운 듯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게 아닌가. 내 소중한 순간들과 기억들이 이런 식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겠구나. 어쩌면 내 삶이 횡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기억들이 남아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때 이후로, 무슨 통과 의례처럼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일기를 쓴다. 집에서 잠자기 전에 써보려고했는데, 잠을 잘 때 쯤이면 벌써 무척 피곤한 상태인 경우가 많아, 건너 뛰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긴 하지만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제 일도 정리하고 오늘 일도 계획하고, 쓸데 없는 생각도 쏟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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