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우연히 고향사투리가 들어간 노래를 들었다. 예전 대학가요제 때 에밀레란 그룹으로 대상을 받았던 팀에 있던 심재경이란 분의 노래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른 것을 보면 아마도 고향이 나와 같은 지역이 아닐까. 경상도라고 해서 사투리가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시더, ~니껴 같은 어미는 다른 경상도 지역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안동, 예천, 영주, 청송, 영양, 봉화 지역 특유의 말이라고 한다.
이 노래를 듣자마자, 아버지 생각이 났다. 돌아가신지 벌써 몇 해가 되었다. 아버지나 나나 살가운 사람들은 아니라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를 추억할 거리가 별로 없다.
완고한 할아버지 때문에 학교 문턱까지만 갔다가 만 아버지는 가진 기술이 군에서 배운 운전 밖에 없으셨다. 택시 운전도 하셨고, 버스 운전을 하실 때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었을 때일 것 같다. 아버지는 일가친척들 이름으로 시골 농협에서 빚을 내, 트럭을 하나 장만하셨다. 고향 마을은 고추농사로 유명한 곳이었고, 근처 다른 동네도 마늘농사로 이름이 난 곳이었는데, 아버지는 시골에서 물건을 밭떼기 형식으로 사다가 경동시장에 가져와 파시는 일을 시작하셨다.
이 사업은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큰 빚은 없었던 우리 살림이, 가난은 그대로인데 빚에 찌들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보다못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장사에 뛰어들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에는 고향동네로 가는 고속도로가 없어, 산넘고 재넘어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새도 넘기어렵다고 해서 조령이라고도 불리는 문경새재를 넘어가야 했는데, 아버지는 트럭을 몰고, 물건을 떼러, 또 물건을 갖고 다시 서울로 올 때마다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아마도 내가 중학생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방학을 맞아 시골에 갈 요량으로 아버지의 트럭을 얻어탔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는 내내 한 마디도 안 하셨던 것 같고, 나 또한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앉아서 고갯길의 구불 구불한 길을 달려가기 위해 아버지가 좌 우로 한껏 운전대를 돌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내내 바라보기만 했다. 그 중간 어디선가 점심인지 저녁인지 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 다른 것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유독 그때 먹은 음식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하다. 육개장이었다. 지금도 나는 육개장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이때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