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Ann Arbor에 있는 지인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책 선정은 한 사람 씩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고, 주제나 형식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그냥 자기가 읽고 싶거나, 읽었는데 함께 공유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걸 선택해서 함께 읽기로 했다.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미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어도 좋겠다 생각하던 차에, 독서 모임에서 이 달에 함께 읽기로 결정이 되었다.

독서평이란 거창한 이름보다는, 다시 책을 읽으면서 공책에 정리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두서 없이 적어놓을 생각이다.

유시민은 오랜동안 다른 책을 발췌, 요약, 해석, 가공하는 일을 해오고 있는데, 혹자는 그를 폄훼할 목적으로 자기 글은 없고, 남의 글을 가져다 여기 저기 갖다 붙이는 재주 밖에 없다한다. 유시민은 그런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으로 이름으로 명명하고, 그 정체성을 오히려 더 강화했다 할 수 있겠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익숙하지가 않다. 늘 다른 사람의 글을 발췌, 요약, 해석, 가공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데다가 또한 10여년을 정치인으로 살아내면서 자기 이야기를 온전히 하기란 쉽지 않았을터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목차를 보면 핵심 주제와 더불어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나와있다. 답만 알고 싶다면 목차만 살펴봐도 된다.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품격있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 품격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답은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이다.

자기 삶은 자기 방식대로 살아야한다. 이유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평범한 삶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고, “닥치는 대로” 살았다. 다만, 눈 앞에 닥쳐온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하면서 살았다.

인생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재능이란 즐기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방법은 없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스스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자기 삶의 의미를 모르면 삶은 비천하고 비루해진다.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그리고 깊이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유시민 –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죽음 – 세상은 그대로, 나만 無로 사라진다. 처절한 상실이 죽음의 공포의 근원이다.

나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내 삶에 주는 기쁨과 의미를 알아야 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죽음을 택하고, 어떤 사람은 강력한 삶의 의지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

삶의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이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설계하고,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밀고나가는 정신의 태도와 능력을 “자유의지”라고 정의한다.

나는 무엇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나? 삶의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살아있는 순간마다 기쁨을 느끼는가?

유시민 –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품위있게 늙는 법에 대한 그의 이야기. 가슴에 새길만한 방법이다.

겸손. 화내지 않기. 없는 티 내지 않기, 배려. 의연, 경청

유시민 – 품위있게 늙는 법

선택적 정의와 공정

조국 법무장관 내정자에 대한 검증 문제로 온 나라가 뒤집어진 듯한 지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처음 의혹이 제기되었던 동생 부부의 문제나 사모 펀드에 대한 문제는 어느 새 뒷전이 되고, 사람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주제인 조국 딸의 입시 문제에 집중 포화가 가해지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자세한 “사실”들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에 더 끌리기 마련이라, 조국이란 사람이 자신의 말과는 다르게, 자식을 포함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살뜰히 챙겨왔다는 표리부동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큰 줄거리로 잡아 놓고, 확인되지 않은 기사들을 쏟아 부음으러써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엄청난 양의 기사가 퍼부어졌고, 대부분은 몇 가지 건조한 사실들을 던져놓고, “만약” 그것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연결되었다면, “문제”다는 식의 아니면 말고 식의 기본적인 취재도 거치지 않은 기사다.

“발로 뛰어” 기사를 쓰라고 했더니, 기사를 “발로 썼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공감하는 바다.

기본 취재 없이도 사실 관계가 틀린 기사에 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고, 몇 시간 뒤면 다시 다른 기사에 묻혀 사라지는 바람에 해당 기사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할까 했던 기회마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압도적으로 쏟아지는 “조국 후보의 딸”의 입시에 대한 의혹 보도에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기사의 수동적 소비자로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며칠이 흘렀다.

언론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 의식은 내려놓고, 사실 확인 없이 무분별하게 의혹을 던지는 모습에서는 정파적 이득을 위해 한 개인과 그 가족의 파멸을 보고야 말겠다는 섬뜩한 의지가 보이는 듯 하다. 물론 의혹이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는 사항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초반에 한 인간과 그 가족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갔던 수 많은 의혹들이 또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근거없었던 의혹들을 근거로 이미 마음 속으로 확증된 조국 후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근거없는 의혹들의 상당부분이 해소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혹들의 세세한 내용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조국 후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그대로 남게 된다.

조국 딸의 대학입시와 대학원 입시와 관련된 대학들에서 이른바 조국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고, 학교 측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거나 열릴 계획이라고 한다.

촛불 집회에 나온 대학생들의 주장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꼰대가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의와 공정은 자기들만이 쌓아 올린 성안에서 자기들의 독점적 이익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했을 때만 들게되는 선택적 정의와 공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들이 외주화한 위험한 작업 환경 속에서 하나 둘 씩 목숨을 잃어갈 때도 침묵했던 그들이, 자기들 학교의 입시와 장학금 지급의 공정성이 의심될 때 비로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아무리 양보해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를 입에 올리려면, 자신은 재단사이면서 여공들의 열악한 삶에 공감하고, 그 허울 뿐인 근로기준법이라도 준수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몸까지 불살라야 했던 전태일을 생각하고, 계엄군이 들이달칠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자신들의 목숨보다 항쟁의 대의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죽음으로 받아들였던 80년 광주의 전남도청을 기억했으면 한다.

자신에게 근로기준법에 대해 설명해 줄 대학생 친구 하나를 간절히 바랬던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 그 뒤 수많은 대학생들을 노동운동으로 이끌었고,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다른 수준으로 끌여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광주에서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인 80년대 내내 지식인 사회를 짓눌렀고, 그것이 87년 민주항쟁의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