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청소와 마지막 인사

9월 25일 금요일. PODS 두 개에 남겨둔 이사짐을 제외하고 나머지 짐들을 바리바리 싸서 U-Haul 트럭을 빌려 Westland 집으로 왔다. U-Haul 트럭에서 짐을 모두 내리고, 트럭을 반납.

9월 26일 토요일. Grand Blanc 집으로 가서 냉장고 정리와 두 개의 차고에 남아있던 잡동사니를 모두 정리했다.

함께 수고한 아들과 함께 기념 사진

이제 정말 정들었던 Grand Blanc 집과는 안녕이다.

10년간 살던 집

결혼해서 독립한 이후에 가장 오래 산 집이 지금 살고 있는 Grand Blanc 집이다. 한국에서 살았던 마지막 집인 파주 교하의 아파트가 아마도 두번째로 오래 살았던 집인데, 다섯 해도 채우지 못했다.

30대 중반에 유학을 와서 40이 되어 학위를 받고 첫 직장을 시작하면서 지금 이 집을 샀다. 다운페이할 돈이 하나도 없어서 은행 감정가 전액을 대출 받고, 그 대출에 대한 보험까지 사야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진이 채 끝나지 않은 때라, 주택 가격이 많이 낮아서, 침실 세 개짜리 아파트의 한달 임대료보다 적은 돈으로도 모기지, 세금, 주택보험이 가능했던 때라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정년보장 심사를 받기 전이라, 자칫하면 다시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가야할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나의 미래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올 수 있었다.

짐을 빼고 나니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생각이 더 난다.

처음 왔을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이제 둘 다 대학생이 되었다. 이 집은 그 과정을 하나 하나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다. 커가는 아이들의 키를 그려놓은 것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나를 돌아보니, 내 40대가 온전히 여기 묻혀있다. 직장에 적응하고, 개인적인 어려움들로 힘들어 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들이 방마다 묻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한국에 갔던 기억도 남아있다. 큰 형이 한 번 왔다 갔고, 어머니와 장인 어른도 한번 다녀 가셨고, 아이들의 기특한 대학 입학도 여기 이 집에서 모두 일어났다.

새로운 직장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당분간 혼자 아파트 생활을 하려던 계획은 COVID-19으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변경이 되었다. COVID가 한창인 지금이 오히려 이사하고 정리하고, 새로 자리 잡을 시간을 가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이사를 계획했다. 직장이 위치한 Dearborn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고, 지난 7월에 시작한 이사 준비는 이제 그 막바지에 도달했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좋은 기억이 아주 많아, 힘든 일을 다 덮고도 남는 이 집에 대한 추억은 이제 묻고, 새 곳에서 새로운 기운으로 50대를 시작하자. 10년만큼은 더 현명해 지고, 인생을 더 알차고, 바르고, 제대로 살기위해 노력하자.

이사 마무리 단계

이사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새로 이사갈 집에 대한 구매를 완료했다. 주택담보 대출을 받았고, 잔금을 모두 치루었다. 공식적으로 우리 집이 된 것이다.

PODS에서 빌린 container들은 9월 29일이 되어서야 옮길 수 있다고 해서, 일단 이번 주 금요일에 Uhaul에서 truck을 하나 빌려서, 당장 필요한 조리 도구와 침구류 그리고 일에 필요한 컴퓨터 등등을 챙겨서 새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같은 날 피아노도 옮기기로 했기 때문에, 피아노가 무사히 집에서 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truck을 운전해서 새 집으로 간다.

이번 주 목요일까지는 오래 간만에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수업 분량도 다 되어가니, 수업 준비도 꼬박 꼬박 챙겨 해 나가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흐트러졌던 몸과 마음을 추스려보도록 하자.

공공의대 정책 반대와 봉건적 계급의식

한국의 갑질 문화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 사회가 표면적으로는 민주 공화정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천년을 넘게 이어온 봉건적 계급 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의사들의 진료거부 사태를 보면서, 전쟁 후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보인 사회 계층간 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계층이 계급으로 고착화하는 현상을 보는 것 같다.

유학 시절 만난 외고 출신이고, 서울대를 졸업한 후배의 말에 따르면, 학과 모임보다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 모이는 학생 수가 많을 정도로 같은 외고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를 과학고와 특목고, 외고 등이 차지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 없이 이런 특별한 고등학교 교육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이미 대학교에 들어가면 비슷한 환경의 학생들 속에 갇혀 지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이른바 조국 사태 때 , 이른바 명문대생들의 선택적’ 분노 – ‘선택적’ 공정성이란 조롱을 받기도 했던 – 이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부모나 환경적 요소는 쉽사리 무시된다) 어렵사리 획득한 특권적 계층 또는 계급이 침해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선택적’ 분노의 본질은 나의 노력으로 획득한 독점적 특혜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봉건적 계급의식과 다르지 않다.

어제 의료정책연구원이란 곳에서 공공의대 정책 반대를 위해 내놓은 다음의 그림은, 부정확한 사실 그 자체보다, 이 문제의 배경에 흐르는 철저한 봉건적 계급의식이다.

의사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 된 것은 경제적 보상과 더불어 직업적 안정성 때문이다. 하지만, ‘학창시절’이라 두루뭉실하게 묘사된 것은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한 고등학교 때까지를 의미할 텐데,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고, 의대에 와서 좋은 의사,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을 믿을만한 의사가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는 것이다. 공공의대는 성적이 ‘한참’ 모자란 학생이 입학한다는 가정도 어이가 없지만, 그렇게 성적이 모자라면 중요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봉건적 계급의식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는데, 성적이 ‘한참’ 모자라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공공의대 정책 반대의 기저에 깔려 있는 후진적 계급의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