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즈음이다. 박사학위를 무사히 받고, 직장을 잡아 미시간으로 이사를 하고, 안정을 잡아가던 시기였는데, 그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힘들 때였던 것 같다. 나를 힘들게 했던 이유는 그 이후 차차 알아가게 되었다. 어쩌면 일기를 쓰게 된 이유도 이것과 연관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때 5학년 때였던가, 이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무렵에 썼던 일기장을 나중에 부끄러운 마음에 대부분을 찢어버렸다. 한 동안 쓰지 않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고, 꾸준히는 아니지만, 가끔씩이라도 일기를 끄적거렸던 것은 대학교 다닐 때까지 였던 것 같다.

제일 왼쪽부터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 일기장. “크지 않는 고독”이란 일기장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열쇠도 없거니와, 열어볼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서는 결혼 생활, 회사 생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광풍이 몰아치는 동안에는 개인 웹사이트를 만들어, 일상을 끄적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종이 일기를 다시 써야지 했던 것은 아마도, 웹사이트 자료라는 게 장기간 유지/보수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것과, 그 무렵 시작한 손가락 관절염 때문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관절염이 더욱 악화될 것 같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키보드 작업을 줄여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기 쓰기가 이제 10여년이 넘어가고 있고, 그동안 모아놓은 일기장이 꽤 많은 분량이 되었다. 대부분이 일상의 단상과 넋두리, 또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지만, 뚜렷하지 않은 생각을 글로 옮겨본다는 것이 여러가지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나서는, 부끄러워서 다시 펼쳐서 읽어보지는 못할지라도 계속 끄적여 나가고 있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형식의 공책. 매일 휴대해야 하다보니, 두꺼운 것보다는 얇은 것, 그리고, 스프링으로 철이 되어 있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해서, 최근에는 단순하고, 작은 것을 이용하고 있다.

일기라는 게 생각의 쓰레기통 같은 것이라, 버리고나면, 열어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얕고, 사악하고, 부끄러운 생각의 쓰레기들이 썩어가며 악취를 풍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그 중 일부라도 발효된 놈들이 남아 있을까하여, 일단은 서랍 깊숙히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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