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리영희.
친위쿠데타가 벌어졌던 한국이나,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이나, 세상은 한치 앞이 안보일 정도로 혼란스럽다. 신경을 빠짝 세운 채로 한 두달이 넘어가니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이러다가는 내란 수괴와 그 동조자들보다 내가 먼저 나가 떨어질 것 같다.
20여년 전에 읽었던 <데이비드 보더니스>가 쓴 <E=mc2>이란 책을 다시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이 통찰에까지 오게된 이야기를 읽다보면 세상 일에 찌든 내 머리도 좀 쉬어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였는데,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이 이런 통찰에 도달할 수 있게되기 까지 기여한 과학자들의 드라마같은 삶. 그리고, 질량은 그것의 광속의 제곱만큼의 배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원자 폭탄. 나치독일과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얽인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어쩌면 머리를 식히는 책으로 적당한 책은 아니었다.
내 방 책꽂이 앞에 서서 무얼 다시 읽을까하다가 <리영희>교수의 <자유인>을 꺼내들었다. 1990년에 출간되었으니 이제는 35년 전이다. 1987년 6.10 항쟁을 통해 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이를 통해 군부독재를 몰아내기는 커녕 전두환의 친구로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중 하나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 리영희 교수는 그 절망 속에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세상에 던져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1988년 월간중앙 12월호에 실린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라는 글은 광복 43년이란 부분을 빼면 마치 어제 쓴 글처럼 시의적절하고 살아있다. 이 글에 인용된 중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노신의 1925년 작품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에는 세 가지 종류의 ‘물에 빠진 개’가 나온다. (1) 자기 실수로 빠진 개, (2) 남이 때려 빠뜨린 개, (3) 내가 때려 물 속에 처박은 개. 이 중에 자신이 맞붙어 싸워 물에 처넣은 개라면 물에 빠진 개를 몽둥이로 힘껏 때린다고 해서 너무하다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사람을 문 개는 뭍에 있거나 물 속에 빠졌거나 모조리 몽둥이질을 해서 혼을 내야 한다”는 것.
“광복 직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집단을 숙정하지 못한 까닭에 이 국민은 단독정권 수립, 민족분단, 영속적인 독재정권 체제 하에 신음해야 했다. <<중략>> 국민이 해야할 일은 민주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들은 잠시 물에 처넣어졌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어설픈 ‘관용론’과 ‘보복불가론’에 힘입어 국면이 바뀌기만 하면 그들은 물에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덤빌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페어플레이는 좋다. 그러나 그것은 페어플레이의 정신을 이해하고 행동할 줄 아는 상대에 대해서만 적용될 미덕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기를 확립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 모른다. 민주혁명을 완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