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학력고사

오늘 수학능력시험이 있었나보다. 한국 뉴스가 온통 수능 관련 뉴스로 뒤덮혔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다. 이맘 때면 나의 학력고사와 그 이후의 삶이 한번씩은 휘익하고 내 머리 속을 스쳐간다. 오늘도 운동을 마치고 옷을 갈아 입으려다가 옷장에 걸린 한양대 학교 점퍼를 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번듯한 직장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에 대한 소박한 꿈을 향해 달려온 학창시절. 그 때는 내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가진 것들도 과분했다. 우리 형제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한 환경을 제공해주시거나 바쁜 생계 때문에 학교 일에 관심을 쏟아주시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공부하는 자식들을 이해해 주셨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동네에서는 흔치않은 일이었다. 내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대부분이 일찌감치 생활현장에 뛰어들었고, 중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이미 어른 흉내를 내고 다니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동네였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우리 반에 좀 논다는 애들 여러 명이 강간으로 잡혀가기도 했고, 내 어렸을 때 가장 친한 친구는 이미 술 때문에 위에 구멍이 나서 배를 갈라야 했고, 여전히 중년의 아줌마가 술시중을 드는 동네의 조그만 술집을 내집처럼 다녔다.

그렇다고 학력고사를 치르기 전까지 공부에만 전념했던 것도 아니다. 한 동안은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방에서 죽돌이로 지내기도 했고, 그 때문에 몇 번의 시험을 망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터라 성적이 크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다가온 학력고사. 시험지를 받아든 나는 적지않이 당황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87년 당시에는 학력고사 시험지는 정갈하게 쓴 손글씨였다. 모의고사에서 보던 인쇄체가 아니란 것에 놀랐고, 학력고사 시험지는 이렇다는 걸 그 때까지도 몰랐다는 내 자신에 대해 더 놀랐다고 하는 게 맞겠다.

사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우리 반 친구가 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나를 불러 수학 시험 중간에 화장실 가겠다고 나와서 자기를 만나서 답을 좀 알려달라고 한 일이다. 힘께나 쓰는 친구도 아니고, 공부에 취미는 없었겠지만 나쁜 친구는 아니었는데,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마하고 승낙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험 중간에 결국에 화장실에 나오기까지는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가뜩이나 긴장했던 수학시험을 잘 보지 못하는데 이 사태가 영향을 미치긴 했을게다.

목표로 했던 학교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과는 없었다. 어떤 학교에 가야겠다는 목표만 있었을 뿐이다. 받아든 학력고사 점수표에 찍힌 기대보다 낮은 점수는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정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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