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타고 다니기

숙소에서 학교까지 버스가 있는지 알아봤다. 다행히 그리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걸 발견하고, 버스 타고 다녀보기로 하다.

한 시간에 한 대 밖에 배차가 안되어 있고, 막차가 오후 9시 27분이다. 8시 전에 학교에 도착하려면 아파트에서 오전 7시 차를 타야한다. 불편하지만 덕분에 출퇴근 시간을 일정하게 맞출 수 있어서 좋다. 8시 전에 출근해서 하루를 느긋하게 시작하고, 퇴근도 너무 늦지 않게 자동으로 조절이 되니 이 또한 좋다.

요금은 한 번에 $2. 하루에 왕복하니 $4로 하루 교통비는 해결된다. 출퇴근 시간에 짧게나마 책도 보고, podcast도 듣을 수 있어서 좋다.

연구-수업-봉사

하루 종일 연구실 앉아서 일을 하다보면,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몰두 하기가 쉽지가 않다. 교수라는 직업이 여러가지 장점들이 있지만, 단점을 들어보면 이또한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단점은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일의 종류가 많다는 점이다. 크게 세 가지의 기본 업무가 있다. 연구, 수업, 그리고 봉사 이렇게 세 가지를 균형잡아야 한다. 연구만 몰두해서 수업을 소홀히 하고, 학교나 과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거나, 최고의 수업 준비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고, 연구는 뒷전이 된다거나, 연구나 수업은 팽개치고, 대외업무에만 발 벗고 나선다거나 하면, 정년심사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이 세가지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 성공적인 교수가 될 수 있는데, 하나에 몰두하다보면 갑자기 다른 것 때문에 마음이 쓰이고, 다른 데로 마음이 옮겨가고 나면, 또 다른 해야할 일이 떠 오르고 하는 식으로 몰입을 방해하는 생각이 흐름이 하루 종일 계속된다.

연구

최신 연구 동향을 따라 잡으려면, 최신 학계 소식과 더불어, 학회나 학회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논문들도 꾸준히 읽어야 한다. 연구실을 운영하려면, 대학원생들이 있어야 하고, 대학원생을 받으려면 연구자금이 필요하다. 연구자금을 따오려면 제안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제안서 작성을 하려면, 수행해야할 연구주제도 명확하게 설명을 해야 하지만, 그 연구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여기 저기 학회에 얼굴도 비춰야하지만, 관련된 연구에 대한 결과물은 논문 형태로 꾸준히 내야, 연구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이런 내용들은 연구 제안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데 필수 요소다.

수업

수업의 중요성은 학교에 따라 다르다. 연구중심 학교에서는 아무래도 수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작고, 학부 중심의 학교들은 수업의 부담도 크고, 수업의 평가에 대한 중요성도 또한 높다. 어떤 학교든지 간에 때로 새로운 과목을 개설하거나, 다른 교수가 가르치던 과목을 맡아서 가르쳐야 하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에 수업 준비도 소홀히할 수는 없는 일이다.

봉사

학교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거나, 학과에서 필요한 일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학교의 일원으로서 충실하게 지내야한다. 처음 시작하는 조교수들은 가능한 최소한으로 맡는 것이 좋다. 회의에 불려다니는 시간이 녹녹치 않게 많기 때문에, 정년심사 전에는 티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 부담이 적은 일들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와 체계를 잡아놓지 않으면,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잡무의 꽁무니만 쫓다가 퇴근하게 되나. 그렇게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지나다보면 하루 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것 같은데, 성과는 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새 연구실

새 연구실로 이사하면서 쌓아두었던 상자들을 대부분 풀어서 정리했다. 전에 쓰던 것보다는 크기도 작고, 책꽂이도 적어서, 풀어놓은 짐들을 넣을 곳들이 마땅치는 않지만, 올 여름에 새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만 임시로 쓰게될 공간이라고 하니, 그럭저럭 버텨보려고 한다.

음식 요리

요리는 내가 즐기는 일이 아니다. 간단히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들여야하는 노력이 비대칭적으로 크다. 식사라는 걸 허기를 채우는 일로 생각해 온 터라, 누가 해 주면 맛있게 먹겠지만, 맛있는 것 먹겠다고 요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던 일이다.

하지만, 아내가 한국에 가고 나서 빈 자리가 크고, 기간도 길어지고 있는 터라, 매번 사 먹거나 즉석식품으로 때우기도 쉽지 않다.

주중에는 학교 때문에 Dearborn에 와 있지만, 주말에는 Grand Blanc에 있는 집에서 지내야한다. 가꿔야할 화초도 있고, 이런 저런 챙겨야할 집안 일들이 있다. 집을 팔고, 학교 근처 도시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는 이런 주말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집에는 아들이 머물고 있는데, 가끔씩이라도 음식다운 음식을 먹여야겠다 결심하고, 주말에 한 두 가지라도 요리를 하기로 했다.

YouTube에서 보고 따라해 본 음식들이다.

고추장 찌게
김치찌게
어묵볶음
시금치 무침
소세지 야채 볶음
떡볶이
카레

동백꽃 필 무렵

“동백꽃 필 무렵”이란 드라마가 Netflix에 올라왔길래, 예고편을 봤는데, 공효진에 강하늘. 게다가 촌놈 강하늘이라니. 뭐야 명품구두 신겨서 밭 일시키는 기분이랄까. 미혼모에 잘 생긴 촌놈 총각이라니…

이게 말이 돼?, 이거 뭐야 하고 안 보고 있었는데, 배경이 되는 동네 옥산이란 곳이 뭔가 익숙하다. 그래서 살펴봤더니, 작년에 다녀온 “구룡포 근대문화역사 거리”다. 배경이 반가와서 별 기대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결론은 근래 내가 봤던 드라마 중에 최고다.

여성주의가 살짝 뿌려진 로맨틱 코미디에 스릴러가 가당키나 하나? 잘 생긴 촌놈 총각에다가가 8살 사내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까멜리아”라는 술집을 운영하는 미혼모 이야기가 궁상맞지 않기가 가능이나 할까? 작가가 천재인 듯.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것들이 잘 버무려진 정말 잘 만든 드라마다. 게다가 덤으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을 깨우쳐주기까지 한다. 제대로 사랑하는 법.

나는 왜 떠나나

지난 10년 간의 케터링(Kettering) 대학에서의 생활을 정리한다. 내년 1월부터 University of Michigan–Dearborn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고민이 없지 않았지만, 크게 망설이지는 않았다.

고민의 이유는 몇 가지였다.

하나는 큰 아들이 아직 케터링을 다니고 있다. 교직원 혜택으로 학비의 98%를 지원받기 때문에 그동안은 2%의 등록금만 내면 되었지만, 내가 떠나고 나면 남은 세 학기 동안은 약간의 장학금을 제외하고 나머지 등록금을 모두 내야한다.

다른 하나는 직급 문제. 현재 나는 부교수(Associate Professor)로서 정년보장(tenured)을 받은 상태이지만, 지금 옮기는 학교에서는 조교수(Assistant Professor)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년보장의 조기신청을 약속받기는 했지만, 교수들의 가장 큰 부담인 정년보장을 받기 위한 노력을 다시 해야한다는 문제였다.

학비 문제는 새로 옮기는 학교에서 2년간 여름학기 두 달치 월급을 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어떻게 해보기로 했지만, 정년보장의 달콤함은 떨쳐버리기가 쉬운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정교수(Full Professor) 신청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고, 또 다시 조교수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정년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과, 새로 시작하게 되면 약간의 startup 자금을 받게되니, 그것으로 연구실을 다시 잘 만들어가면 될 것이라 스스로를 토닥였다.

학교를 옮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연구환경이다. 케터링처럼 학생 등록금 의존율이 높은 학교는 신입생 수가 어느 수준이상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몇 년간은 경제상황이 좋은 상태에서도 신입생 수가 감소하고 있고, 상황이 앞으로도 크게 좋아질 것 같지 않다.

이렇게 되면, 학교는 여러가지 긴축정책을 펼치게 되고, 그런 작업들이 요 근래 몇 년간 진행되고 있다. Professor of Practice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정년보장이 되지 않는 교수직을 만들었고, 퇴직한 교수들의 자리를 강사 또는 비정년교수로 채우고 있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교수당 수업시간을 늘이려고 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전체적으로 수업 부담을 늘여감으로써 연구할 수는 여건이 점점 안 좋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벌써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지만,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직 연구자로서의 욕심이 내 안에 남아있고,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어디가서 하기가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남들처럼 제대로 된 연구를 해서, 인용지수가 높은 논문을 쓰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들이 나를 움직이는지 찬찬히 내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 쉽지 않겠지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의 경험을 다시 돌아보고, 연구자로서 연구실 관리자로서 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갈 지 고민해보고, 새 연구실도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새 연구실의 이름은 비미(BIMI-Bio Inspired Machine Intelligence) 연구실이다. 우리말로는 생체기계지능 연구실이라고 할 작정이다. 장기적으로는 뇌활동의 모델링을 기반으로 기계지능을 만드는 일을 할 생각이다.

선택적 정의와 공정

조국 법무장관 내정자에 대한 검증 문제로 온 나라가 뒤집어진 듯한 지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처음 의혹이 제기되었던 동생 부부의 문제나 사모 펀드에 대한 문제는 어느 새 뒷전이 되고, 사람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주제인 조국 딸의 입시 문제에 집중 포화가 가해지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자세한 “사실”들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에 더 끌리기 마련이라, 조국이란 사람이 자신의 말과는 다르게, 자식을 포함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살뜰히 챙겨왔다는 표리부동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큰 줄거리로 잡아 놓고, 확인되지 않은 기사들을 쏟아 부음으러써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엄청난 양의 기사가 퍼부어졌고, 대부분은 몇 가지 건조한 사실들을 던져놓고, “만약” 그것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연결되었다면, “문제”다는 식의 아니면 말고 식의 기본적인 취재도 거치지 않은 기사다.

“발로 뛰어” 기사를 쓰라고 했더니, 기사를 “발로 썼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공감하는 바다.

기본 취재 없이도 사실 관계가 틀린 기사에 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고, 몇 시간 뒤면 다시 다른 기사에 묻혀 사라지는 바람에 해당 기사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할까 했던 기회마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압도적으로 쏟아지는 “조국 후보의 딸”의 입시에 대한 의혹 보도에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기사의 수동적 소비자로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며칠이 흘렀다.

언론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 의식은 내려놓고, 사실 확인 없이 무분별하게 의혹을 던지는 모습에서는 정파적 이득을 위해 한 개인과 그 가족의 파멸을 보고야 말겠다는 섬뜩한 의지가 보이는 듯 하다. 물론 의혹이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는 사항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초반에 한 인간과 그 가족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갔던 수 많은 의혹들이 또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근거없었던 의혹들을 근거로 이미 마음 속으로 확증된 조국 후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근거없는 의혹들의 상당부분이 해소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혹들의 세세한 내용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조국 후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그대로 남게 된다.

조국 딸의 대학입시와 대학원 입시와 관련된 대학들에서 이른바 조국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고, 학교 측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거나 열릴 계획이라고 한다.

촛불 집회에 나온 대학생들의 주장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꼰대가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의와 공정은 자기들만이 쌓아 올린 성안에서 자기들의 독점적 이익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했을 때만 들게되는 선택적 정의와 공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들이 외주화한 위험한 작업 환경 속에서 하나 둘 씩 목숨을 잃어갈 때도 침묵했던 그들이, 자기들 학교의 입시와 장학금 지급의 공정성이 의심될 때 비로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아무리 양보해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를 입에 올리려면, 자신은 재단사이면서 여공들의 열악한 삶에 공감하고, 그 허울 뿐인 근로기준법이라도 준수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몸까지 불살라야 했던 전태일을 생각하고, 계엄군이 들이달칠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자신들의 목숨보다 항쟁의 대의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죽음으로 받아들였던 80년 광주의 전남도청을 기억했으면 한다.

자신에게 근로기준법에 대해 설명해 줄 대학생 친구 하나를 간절히 바랬던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 그 뒤 수많은 대학생들을 노동운동으로 이끌었고,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다른 수준으로 끌여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광주에서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인 80년대 내내 지식인 사회를 짓눌렀고, 그것이 87년 민주항쟁의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다시, 시작

내게조차 버려진 이 블로그에 거의 열 달만에 다시 들어와 본다.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긴이후로 자판으로 글쓰기를 의도적으로 피한 면도 있고, 종이 일기에 감정의 쓰레기들을 던져 놓기 시작한 이후로는 굳이 이곳에다가 넉두리를 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학기에는 새로 하기로 한 일들이 여러가지로 겹친데다가 수업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수업이 두 개가 한꺼번에 잡히는 바람에 하루 하루를 전쟁처럼 보냈다.

이번 학기는 다행히 약간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겨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나를 돌아보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2009년에 7월에 지금 하는 일을 시작했으니, 올 해 7월이 되면 만 10년이 된다. 여태껏 했던 어떤 일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한 일이 되었지만, 가장 짧게 느껴지는 지난 10년이다.

앞으로 얼마 동안 건강한 상태로 더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잠시 숨고르기를 해보고,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내 안의 욕망에 더 귀기울여 보기로 한다.

목표와 소원

소원은 결론만 보는 것.

목표는 성취하는데 필요한 구체적 행동 단계가 있는 것. 다섯 가지 단계

  • 글로 쓰고
  • 구체적으로
  • 순서가 있어야
  • 측정 가능해야
  • 계획표

세 가지 기간

  • 단기: 오늘
  • 중기: 한달에서 몇 년
  • 장기: 인생

중요한 점. 목표를 향한 여행을 즐겨야 한다. 날마다의 작은 발걸음은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육개장

엊그제 우연히 고향사투리가 들어간 노래를 들었다. 예전 대학가요제 때 에밀레란 그룹으로 대상을 받았던 팀에 있던 심재경이란 분의 노래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른 것을 보면 아마도 고향이 나와 같은 지역이 아닐까. 경상도라고 해서 사투리가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시더, ~니껴 같은 어미는 다른 경상도 지역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안동, 예천, 영주, 청송, 영양, 봉화 지역 특유의 말이라고 한다.

이 노래를 듣자마자, 아버지 생각이 났다. 돌아가신지 벌써 몇 해가 되었다. 아버지나 나나 살가운 사람들은 아니라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를 추억할 거리가 별로 없다.

완고한 할아버지 때문에 학교 문턱까지만 갔다가 만 아버지는 가진 기술이 군에서 배운 운전 밖에 없으셨다. 택시 운전도 하셨고, 버스 운전을 하실 때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었을 때일 것 같다. 아버지는 일가친척들 이름으로 시골 농협에서 빚을 내, 트럭을 하나 장만하셨다. 고향 마을은 고추농사로 유명한 곳이었고, 근처 다른 동네도 마늘농사로 이름이 난 곳이었는데, 아버지는 시골에서 물건을 밭떼기 형식으로 사다가 경동시장에 가져와 파시는 일을 시작하셨다.

이 사업은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큰 빚은 없었던 우리 살림이, 가난은 그대로인데 빚에 찌들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보다못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장사에 뛰어들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에는 고향동네로 가는 고속도로가 없어, 산넘고 재넘어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새도 넘기어렵다고 해서 조령이라고도 불리는 문경새재를 넘어가야 했는데, 아버지는 트럭을 몰고, 물건을 떼러, 또 물건을 갖고 다시 서울로 올 때마다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아마도 내가 중학생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방학을 맞아 시골에 갈 요량으로 아버지의 트럭을 얻어탔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는 내내 한 마디도 안 하셨던 것 같고, 나 또한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앉아서 고갯길의 구불 구불한 길을 달려가기 위해 아버지가 좌 우로 한껏 운전대를 돌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내내 바라보기만 했다. 그 중간 어디선가 점심인지 저녁인지 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 다른 것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유독 그때 먹은 음식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하다. 육개장이었다. 지금도 나는 육개장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이때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