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정의와 공정

조국 법무장관 내정자에 대한 검증 문제로 온 나라가 뒤집어진 듯한 지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처음 의혹이 제기되었던 동생 부부의 문제나 사모 펀드에 대한 문제는 어느 새 뒷전이 되고, 사람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주제인 조국 딸의 입시 문제에 집중 포화가 가해지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자세한 “사실”들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에 더 끌리기 마련이라, 조국이란 사람이 자신의 말과는 다르게, 자식을 포함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살뜰히 챙겨왔다는 표리부동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큰 줄거리로 잡아 놓고, 확인되지 않은 기사들을 쏟아 부음으러써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엄청난 양의 기사가 퍼부어졌고, 대부분은 몇 가지 건조한 사실들을 던져놓고, “만약” 그것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연결되었다면, “문제”다는 식의 아니면 말고 식의 기본적인 취재도 거치지 않은 기사다.

“발로 뛰어” 기사를 쓰라고 했더니, 기사를 “발로 썼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공감하는 바다.

기본 취재 없이도 사실 관계가 틀린 기사에 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고, 몇 시간 뒤면 다시 다른 기사에 묻혀 사라지는 바람에 해당 기사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할까 했던 기회마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압도적으로 쏟아지는 “조국 후보의 딸”의 입시에 대한 의혹 보도에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기사의 수동적 소비자로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며칠이 흘렀다.

언론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 의식은 내려놓고, 사실 확인 없이 무분별하게 의혹을 던지는 모습에서는 정파적 이득을 위해 한 개인과 그 가족의 파멸을 보고야 말겠다는 섬뜩한 의지가 보이는 듯 하다. 물론 의혹이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는 사항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초반에 한 인간과 그 가족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갔던 수 많은 의혹들이 또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근거없었던 의혹들을 근거로 이미 마음 속으로 확증된 조국 후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근거없는 의혹들의 상당부분이 해소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혹들의 세세한 내용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조국 후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그대로 남게 된다.

조국 딸의 대학입시와 대학원 입시와 관련된 대학들에서 이른바 조국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고, 학교 측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거나 열릴 계획이라고 한다.

촛불 집회에 나온 대학생들의 주장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꼰대가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의와 공정은 자기들만이 쌓아 올린 성안에서 자기들의 독점적 이익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했을 때만 들게되는 선택적 정의와 공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들이 외주화한 위험한 작업 환경 속에서 하나 둘 씩 목숨을 잃어갈 때도 침묵했던 그들이, 자기들 학교의 입시와 장학금 지급의 공정성이 의심될 때 비로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아무리 양보해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를 입에 올리려면, 자신은 재단사이면서 여공들의 열악한 삶에 공감하고, 그 허울 뿐인 근로기준법이라도 준수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몸까지 불살라야 했던 전태일을 생각하고, 계엄군이 들이달칠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자신들의 목숨보다 항쟁의 대의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죽음으로 받아들였던 80년 광주의 전남도청을 기억했으면 한다.

자신에게 근로기준법에 대해 설명해 줄 대학생 친구 하나를 간절히 바랬던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 그 뒤 수많은 대학생들을 노동운동으로 이끌었고,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다른 수준으로 끌여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광주에서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인 80년대 내내 지식인 사회를 짓눌렀고, 그것이 87년 민주항쟁의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최저임금 관련 논란

지난 대선 때 모든 유력 후보들이 약속했던 최저임금 1만원까지 인상 공약. 문재인 정부에서 이 약속을 지키려다가 보수매체로부터 융단폭격을 받아왔고, 그 공격이 꽤 성공적이었다. 지난 2년간 큰 폭으로 올리던 최저임금이 결국 올 해는 2.87%의 시급 인상에 그쳤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01561.html

최저임금을 올리면, 임금부담 때문에 고용이 줄고, 자영업자들은 줄도산을 할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보수경제지들의 전폭적인 지지덕분에 힘을 얻은 형세다. 경제가 어려운 이유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때문이라는 논리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또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새다.

최저임금 문제가 이런 식으로 그렇게 단순한 도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가장 간단한 반례로,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내려면, 임금부담이 줄어드니 고용이 늘고, 자영업자들은 임금걱정없어 만세를 부를 것이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자명해보이는데,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때문만은 아닐 것인데,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공격하려고 과도하게 부풀려진 면이 있다고 본다.

지난 2년간의 두 자리 수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894933.html

요약하자면, 임금격차는 줄었지만, 노동시간과 고용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결과를 보였다는 것이다. 1년이 약간 넘는 기간동안 소규모 자영업체과 중소 제조업체 94곳을 심층면접하는 방식으로 조사했다고 한다. 조사 기간이 최저임금의 두 번째 두 자리 수 인상 기간과 겹치는 문제가 있고, 그렇다면, 지난 2년 간의 두 자리 수 최저 임금 인상의 결과라고 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최저 임금 인상이 경제에 미치는 결과를 제대로 논의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이르다.

지난 10년 간의 최저임금과 고용률의 변화를 살펴본 기사도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00831.html

하지만 고용률은 임금 이외에도 산업구조의 변화같은 다른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텐데, 둘 사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상관관계를 도출했다는 점에서 지적받을 만하다.

그런 면에서 다음의 기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https://www.vox.com/the-highlight/2019/7/13/20690266/seattle-minimum-wage-15-dollars

이 기사는 미국 시애틀에서 최저 시급을 2015년에 15달러로 올리고 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고찰한 것이다. 몇 가지 연구 결과를 소개했고,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후에 벌어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살펴봤다. 보수매체의 “선동”대로라면, 9달러 정도에서 15달러로 급격하게 올렸으니 시애틀의 경제는 파탄이 났어야 할텐데, 결론적으로 말해, 결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나타났고, 경제가 파탄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애초의 우려와는 달리, 시애틀에는 매 달 40개의 새로운 식당이 생기고 잏으며, 식당과 술집에서 고용하는 인원은 2015년 이후 134,000명에서 158,000으로 오히려 증가했고, 고용주들을 면접한 결과, 최저임금 15달러 인상 이후에 사업을 그만두거나 다른 주로 옮기겠다는 대답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노동시간이 아주 적었던 저소득층은 전체 임금은 거의 그대로이고, 상대적으로 긴 노동시간을 가졌던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크게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시애틀에서의 이런 결과가 다른 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날 것에는 조심스러운 편이다. 시애틀의 경제가 좋은 편이라 저임금 일자리가 줄어들고, 고임금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높은 최저 임금이 절대악은 분명히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시작

내게조차 버려진 이 블로그에 거의 열 달만에 다시 들어와 본다.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긴이후로 자판으로 글쓰기를 의도적으로 피한 면도 있고, 종이 일기에 감정의 쓰레기들을 던져 놓기 시작한 이후로는 굳이 이곳에다가 넉두리를 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학기에는 새로 하기로 한 일들이 여러가지로 겹친데다가 수업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수업이 두 개가 한꺼번에 잡히는 바람에 하루 하루를 전쟁처럼 보냈다.

이번 학기는 다행히 약간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겨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나를 돌아보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2009년에 7월에 지금 하는 일을 시작했으니, 올 해 7월이 되면 만 10년이 된다. 여태껏 했던 어떤 일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한 일이 되었지만, 가장 짧게 느껴지는 지난 10년이다.

앞으로 얼마 동안 건강한 상태로 더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잠시 숨고르기를 해보고,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내 안의 욕망에 더 귀기울여 보기로 한다.

우울할 땐 뇌과학

걱정과 불안

걱정: 잠재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

불안: 잠재적 문제에 대해 ‘느끼는’ 것.

불안이란 잠재적 위험일 뿐인데, 실제위험이라고 느껴서 뇌의 공포회로가 활성화한 결과이다.

통제할 수 있는 일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 상태을 ‘인지’하면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어서 편도체를 진정시킨다.

감정을 언어로 옮기는 일은 뇌회로를 재배선하고 기분이 좋아지게 도움을 준다.

주의회로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 판단하는 곳이며 감정회로와 연결되어 있다. 감정회로는 부정적인 것에 더 쉽게 활성화한다. 뇌는 부정편향을 갖고 있어서 상황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판단하지 않는 알아차림’을 연습해야 한다.

실수를 하면 감정적인 편도체가 자동으로 가동되지만 자신의 감정 반응을 ‘인식’하면 전전두피질이 활성화하면서 편도체를 진정시킨다.

자신의 뇌가 불확실성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확실성은 감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란 통증의 가능성에 대한 육체적 감정적 반응이다.

긴 포옹은 옥시토신을 방출하게 만들며 이는 편도체 반응성을 떨어뜨린다.

운동, 숙면, 마사지는ㄴ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의 방출을 돕는데, 이는 긍정적 사건에 대한 주의를 증가시킨다.

낙천성 회로 강화하기

  • 미래의 긍정적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상상한다.
  • 일어날 수 있다. 일어날 것이다 기대 한다.

biofeedback

우리가 행동으로 뇌의 반응을 바꿀 수 있다. 길고 깊게 호흡하기 –> 행복하다는 신호를 준다 –> 고개를 들고 미소 짓기

  • 미소 –> 행복하면 짓는다. 반대로 지으면 행복. 긍정적 감각이 커진다
  • 반듯한 자세 –> biofeedback의 주요 근원
  • 평온한 표정
  • 천천히 깊게 호흡: 6번 들이마시고, 2초간 쉬웠다가, 6번 내쉬고. 이를 반복.
  • 근육 이완

습관

고치기 어려우니 습관이다. ‘이런 습관이 있군’하고 알아 차리기. 오래된 습관은 제거되지 않고, 더 강력한 습관에 의해 약화된다.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습관이 강화된다. 충동을 억제하는 세로토닌은 공급량에 한계가 있다. 충동에 저항하는 일은 제한된 수의 총알로 좀비군단과 싸우는 일이다. 해결책은 연습을 통해 더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

습관은 선조체(corpus striatum)가 통제. 반복 행동은 배측 선조체, 충동은 측좌핵 (도파민을 분비) 에서 관장.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

계획은 수정하고 다시 만드는데 그 유용함이 있다.

일단 시도하고 바꾸고 다시 시도한다.

기억이란 아무리 강한 기억이라도 2년 후에는 대상자의 10%만이 정확히 기억.

욕망.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만의 지도를 가지려면 유아의 마음으로 세상을 탐구해야 한다.

내 욕망은 어떻게 찾나? 자신만의 가치 평가 능력을 키워야. 가치 평가 능력이란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을 한 경험을 토대로 내 앞에 놓은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다.

삶의 통합성

나의 가치는 나의 삶, 행동, 말에서 나온다. 진짜 나를 찾아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을 속이는 일부터 중단해야 한다. 내면의 나와 외연의 나를 통일시키려 노력해야. 말과 행동과 생각이 일치해야 삶의 통합성이 유지된다. 내 전체 존재가 하나가 되어야 늘 당당할 수 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다시 읽다.

“다시” 읽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지는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니,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 외에는 모든 게 새롭다. 아마도 읽지 않고, 읽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고, 읽기는 했으나, 번역투의 현란하면서도 지루한 설명에 꾸역 꾸역 페이지만 넘겼을 수도 있다.

“에밀 씽클레어의 어릴 적 이야기”라는 부제가 있었다는 것도 새롭고, 데미안이란 이 소설이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그림자가 뚜렷하다는 것도, 아브락사스(또는 아브라삭스)를 찾아보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데미안이란 이름 자체도 데미우르고스라는 물질세계를 창조했다고 여겨지는 신의 이름에세 따왔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책의 서언으로 다시 돌아와서 발견한 한 문장이 이 소설의 내용을 아우른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고, 그 길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며, 오솔길을 찾아가는 암시이다.

Each man’s life represents a road toward
himself, an attempt at such a road, the intimation of a path.

인생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삶이란 그 길 위의 한 가지 시도이며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러 경로 중에 한 가지를 찾는 실마리이다.

 

표현의 기술

지난 번 한국에 갔을 때, 서점에서 발견한 책. 유시민의 신작, “표현의 기술”이다. 서점 주인 말씀이 유시민 책은 나오기만 하면 아주 잘 나간다면서 이 분은 책이나 계속 쓰면 좋을텐데, 왜 정치한다고 했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셨다. 그 말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유시민의 책을 거의 모두 사기는 했던 것 같다. 유시민이 생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둔 것은 한국정치에는 마이너스 요소가 되겠지만 출판계에는 플러스가 되는 일이겠고, 독자로서 그의 책을 더 자주 만나게 되는 일이니 독자로서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인데, 유시민이 정치를 그만두게 된 이유말이다. 그건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그 이후의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대중에 대한 분노, 실망 그런 마음이 가장 큰 축이 아닐까. 어쩌면 자칭 자유주의자로서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주류로서의 모든 배경을 가진 사람이, 주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으며, 권력욕 이상의 그 무엇인가(희생? 봉사?)를 위한 정치를, 도저히 답이 없어보이는 대중을 위해 계속 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할만큼 했다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한 번뿐인 인생,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 때도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목표와 소원

소원은 결론만 보는 것.

목표는 성취하는데 필요한 구체적 행동 단계가 있는 것. 다섯 가지 단계

  • 글로 쓰고
  • 구체적으로
  • 순서가 있어야
  • 측정 가능해야
  • 계획표

세 가지 기간

  • 단기: 오늘
  • 중기: 한달에서 몇 년
  • 장기: 인생

중요한 점. 목표를 향한 여행을 즐겨야 한다. 날마다의 작은 발걸음은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용서의 기술

용서의 기술 – 4장.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이 당신을 죽인다.

현실자체보다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신체반응을 결정하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용서의 기술 – 5장. 억울한 사연은 스스로 만든다.

인간의 기억은 왜곡된다. 기억이란 선택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을 ‘사실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확증할 수도 없는 상대방의 의도를 ‘확증할 수 있는 사악한 의도’라고 믿는다. 이는 파악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믿어버린다.

억울한 사연. 이렇게 된 건 내 선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만든 것이며 이것은 부당한 일이며, 이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개인적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피해자는 사건의 가혹함을 과장해서 자신의 책임을 축소하고 공격자 때문에 자신의 미래가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용서의 기술 – 6장. 용서는 선택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건 ‘기회’가 아니라 ‘선택’이다.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읠 보는 당신의 해석/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

행복의 비밀은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려는 마음에 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과거를 바꾸려고 애쓰는 일이다. 과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