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학교는 아직 정상적으로 열리지 않는 상태.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사전 등록을 하고, 학교의 지정된 장소에만 방문이 가능하다.

그래도 출퇴근을 하는 형식으로 하루를 보내느 것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을 유지하기가 좋을 것 같아, 아무도 나오지 않는 학교에 가고 있다.

퇴근하면서 바라본 노을이 해지는 하늘을 불태우는 같다.

2021년 새해

2021년이라는 수자가 아직도 낯선데, 새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2021이라면 어릴 적 상상하던 미래. 우주 여행이 일상이 되고, 지능 로봇이 인간의 궂은 일을 대신해 주는 그런 세상. 어떤 분야는 상상 이상으로 더 발전을 했고, 어떤 분야는 상상보다 진전 속도가 더디다.

2020년 2021년이라는 미래 세계에 살게 되었는데, 과거의 유산 같은 전염병으로 온 인류가 고통받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월도 어느 사이 19일이 지나가고 있고, 새 학기가 시작했지만, 집에서 지내는 일이 일상이 되어서인지, 학기 구분과 시간 구분이 쉽지가 않아서일까, 새 학기 시작이라는 어떤 활기도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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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뒤적인 독서공책에서 지난 여름에 적어놓은 것을 발견. 아마도 어떤 자기 계발서 종류를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장단점과 관심 고민을 적어놓았는데, 신년이 되어서 곱씹어 보면 좋을 듯 해서 옮겨놓는다.

  • 자발적으로 열심히 한 것: 전직 준비, 취업 준비, 이사
  • 해 보길 잘 했다: 취업 준비, 이사
  • 해야 했는데 하지 않은 것: 글쎄…
  • 관심, 고민: 새 학교에 잘 정착하고, 연구자로서 자리 잡는 문제
  •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해보고 싶은 것: 기술 기반 자기 사업?

잘 산다는 것.

  • 고유의 성격으로 세상과 조화롭게 사는 것.
  • 다른 사람, 다른 성격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사한 후

지난 10년간 살던 집을 떠나,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직장을 옮기면서 진작에 했어야 하느 이사지만, 사정상 미뤄오다가, 지난 7월부터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시작한 이사 준비가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다.

지난 세 달 동안 이런 저런 우여곡절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이렇게 새 집에 무사히 앉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이사 짐을 싸면서 정말 이것까지 버려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렸는데도, 이사 온 집에는 아직도 풀어서 정리할 상자들이 한 방에 가득 쌓여있고, 부엌 살림이며, 책이며, 정리할 것이 산더미 같이 많이 남아있다.

그래도 잠자고, 씻고, 밥하고, 음식하고, 커피를 내리는 기초적인 생활은 가능한 상태가 된 것에 감사한다.

짐을 정리하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1. 하찮은 인생, 목숨 부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이 참 많기도 하다는 것과,2. 그동안 사는 데 필요없는 것들을 참 많이도 챙겨 갖고 있구나 하는 것.
이사를 위해 대부분의 짐들을 싸서 컨테이너에 넣어놓고, 기초적인 조리도구와 그룻 몇 개 그리고 당장 입을 옷 몇가지만 갖고도 몇 주 동안 별탈없이 살아지는 걸 보면서 새삼스레 느낀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라.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없더라

이제 새 집에서 이사짐 정리

9월 27일 일요일. 식사를 위해 급한대로 부엌과 식탁부터 정리.

9월 29일 화요일 PODS에 넣어두었던 짐들이 무사히 도착했다. 냉장고와 소파 때문에 인부를 불렀다. 10월 1일 목요일 두 명의 인부가 10시 쯤 도착해서, 3시가 조금 안될 때까지 작업하고 돌아갔다.

현관문을 떼어내고서도 냉장고가 2층으로 올라오지 못해서, 냉장고의 문들을 모두 떼어내야했다. 다행히 며칠 전 공부해둔 냉장고 문 해체 방법에 따라 무사히 문들을 모두 떼어내고 2층으로 냉장고를 옮길 수 있었다.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냉장고 자리가 정확히 냉장고 크기만큼이라, 바닥의 siding이라고 하는 부분을 떼어내지 않으면 냉장고가 들어가지 않는다. 어설픈 도구들만으로 힘들게 떼어내어고 겨우 겨우 냉장고를 제자리에 넣을 수가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주방용품들 정리하고, 가구들 제자리에 배치하고, 상자에 들어있는 짐들을 풀어서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당장 급하게 쓰지 않을 물건들은 아예 상자에서 빼지 않기로 한다. 일단 이 많은 상자들을 어떻게든 정리해서 사람 사는 집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로 한다.

10월 1일은 급한대로 침대를 정리. 거의 일주일만에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10월 2일 금요일에는 원격수업을 위해 내 서재를 정리하고 1층의 하늘이 생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쌓여있던 상자들을 정리했다. 10월 3일 토요일에는 부엌 살림을 정리해서, 간단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해 놓았다.

오늘 10월 4일 일요일은 내일부터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짐정리는 잠시 쉬고, 밀린 업무와 내일 수업 준비에 전념하기로 한다.

이번 주에는 일단 거실에 나와 있는 상자들을 바다방으로 옮겨놓기로 하자. 거실에 가구 배치가 정리가 되고 나서, 상자들을 하나씩 푸는 것으로 하자.

집 청소와 마지막 인사

9월 25일 금요일. PODS 두 개에 남겨둔 이사짐을 제외하고 나머지 짐들을 바리바리 싸서 U-Haul 트럭을 빌려 Westland 집으로 왔다. U-Haul 트럭에서 짐을 모두 내리고, 트럭을 반납.

9월 26일 토요일. Grand Blanc 집으로 가서 냉장고 정리와 두 개의 차고에 남아있던 잡동사니를 모두 정리했다.

함께 수고한 아들과 함께 기념 사진

이제 정말 정들었던 Grand Blanc 집과는 안녕이다.

10년간 살던 집

결혼해서 독립한 이후에 가장 오래 산 집이 지금 살고 있는 Grand Blanc 집이다. 한국에서 살았던 마지막 집인 파주 교하의 아파트가 아마도 두번째로 오래 살았던 집인데, 다섯 해도 채우지 못했다.

30대 중반에 유학을 와서 40이 되어 학위를 받고 첫 직장을 시작하면서 지금 이 집을 샀다. 다운페이할 돈이 하나도 없어서 은행 감정가 전액을 대출 받고, 그 대출에 대한 보험까지 사야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진이 채 끝나지 않은 때라, 주택 가격이 많이 낮아서, 침실 세 개짜리 아파트의 한달 임대료보다 적은 돈으로도 모기지, 세금, 주택보험이 가능했던 때라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정년보장 심사를 받기 전이라, 자칫하면 다시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가야할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나의 미래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올 수 있었다.

짐을 빼고 나니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생각이 더 난다.

처음 왔을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이제 둘 다 대학생이 되었다. 이 집은 그 과정을 하나 하나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다. 커가는 아이들의 키를 그려놓은 것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나를 돌아보니, 내 40대가 온전히 여기 묻혀있다. 직장에 적응하고, 개인적인 어려움들로 힘들어 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들이 방마다 묻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한국에 갔던 기억도 남아있다. 큰 형이 한 번 왔다 갔고, 어머니와 장인 어른도 한번 다녀 가셨고, 아이들의 기특한 대학 입학도 여기 이 집에서 모두 일어났다.

새로운 직장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당분간 혼자 아파트 생활을 하려던 계획은 COVID-19으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변경이 되었다. COVID가 한창인 지금이 오히려 이사하고 정리하고, 새로 자리 잡을 시간을 가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이사를 계획했다. 직장이 위치한 Dearborn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고, 지난 7월에 시작한 이사 준비는 이제 그 막바지에 도달했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좋은 기억이 아주 많아, 힘든 일을 다 덮고도 남는 이 집에 대한 추억은 이제 묻고, 새 곳에서 새로운 기운으로 50대를 시작하자. 10년만큼은 더 현명해 지고, 인생을 더 알차고, 바르고, 제대로 살기위해 노력하자.

이사 마무리 단계

이사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새로 이사갈 집에 대한 구매를 완료했다. 주택담보 대출을 받았고, 잔금을 모두 치루었다. 공식적으로 우리 집이 된 것이다.

PODS에서 빌린 container들은 9월 29일이 되어서야 옮길 수 있다고 해서, 일단 이번 주 금요일에 Uhaul에서 truck을 하나 빌려서, 당장 필요한 조리 도구와 침구류 그리고 일에 필요한 컴퓨터 등등을 챙겨서 새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같은 날 피아노도 옮기기로 했기 때문에, 피아노가 무사히 집에서 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truck을 운전해서 새 집으로 간다.

이번 주 목요일까지는 오래 간만에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수업 분량도 다 되어가니, 수업 준비도 꼬박 꼬박 챙겨 해 나가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흐트러졌던 몸과 마음을 추스려보도록 하자.

공공의대 정책 반대와 봉건적 계급의식

한국의 갑질 문화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 사회가 표면적으로는 민주 공화정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천년을 넘게 이어온 봉건적 계급 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의사들의 진료거부 사태를 보면서, 전쟁 후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보인 사회 계층간 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계층이 계급으로 고착화하는 현상을 보는 것 같다.

유학 시절 만난 외고 출신이고, 서울대를 졸업한 후배의 말에 따르면, 학과 모임보다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 모이는 학생 수가 많을 정도로 같은 외고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를 과학고와 특목고, 외고 등이 차지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 없이 이런 특별한 고등학교 교육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이미 대학교에 들어가면 비슷한 환경의 학생들 속에 갇혀 지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이른바 조국 사태 때 , 이른바 명문대생들의 선택적’ 분노 – ‘선택적’ 공정성이란 조롱을 받기도 했던 – 이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부모나 환경적 요소는 쉽사리 무시된다) 어렵사리 획득한 특권적 계층 또는 계급이 침해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선택적’ 분노의 본질은 나의 노력으로 획득한 독점적 특혜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봉건적 계급의식과 다르지 않다.

어제 의료정책연구원이란 곳에서 공공의대 정책 반대를 위해 내놓은 다음의 그림은, 부정확한 사실 그 자체보다, 이 문제의 배경에 흐르는 철저한 봉건적 계급의식이다.

의사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 된 것은 경제적 보상과 더불어 직업적 안정성 때문이다. 하지만, ‘학창시절’이라 두루뭉실하게 묘사된 것은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한 고등학교 때까지를 의미할 텐데,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고, 의대에 와서 좋은 의사,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을 믿을만한 의사가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는 것이다. 공공의대는 성적이 ‘한참’ 모자란 학생이 입학한다는 가정도 어이가 없지만, 그렇게 성적이 모자라면 중요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봉건적 계급의식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는데, 성적이 ‘한참’ 모자라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공공의대 정책 반대의 기저에 깔려 있는 후진적 계급의식이 아닐까?

한국 코로나19 상황

한국에서 코로나19 치명률이 2% 정도로 낮고, 완치율이 90% 이상으로 계절성 독감과 비슷한 수준인데, 정치적인 이유로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있다는 그럴 듯한 가짜 뉴스가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와 정부와 방역당국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낮은 치명률과 높은 완치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방역의 성과를 역으로 정부를 공격하는 용도로 쓰면서,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광화문에 모인 많은 분들이 이런 뉴스를 듣고, 안심하고(?) 집회에 참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가 얼마나 위험한 바이러스인지, 한국의 방역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국 전체와 비교하면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가 살고 있는 미시간 주와 비교해 보겠다.


미시간 주는 인구가 약 1천만이고, 면적은 남한의 약 2.5배이다. 초기에 강력한 봉쇄정책으로 코로나19에 대한 대비가 그나마 비교적 잘 되어온 주이고, 최근에 일일 확진자 수가 500명에서 600명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누적 사망자 수는 오늘 현재 6,607명이다.

한국 인구가 미시간 인구의 약 5배이니, 미시간이 한국인구와 비슷하다고 가정해보면 이 통계는 다음과 같다. 일일 확진자가 2,500에서 3,000명 정도가 꾸준히 나오면서 안정되어 가고 있고, 누적 사망자 수는 33,000명 정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이 정도가 잘 관리되고 있다고 평가받는 수준이다.

한국의 누적 사망자 수 306명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해보자. 한국이 미시간 주 수준의 방역을 했다면, 확진자는 500,000명, 사망자는 33,000명이고, 어제 하루만 해도 75분(어제 미시간 사망자 15)이 돌아가셨다는 얘기가 된다.

최근 확진자가 급증한 남부의 주들로 계산하면 이것보다 훨씬 상황이 나쁠게다.
방역과 공공의료 시스템, 그리고 감염병 관련 법률로 구한 목숨의 수자는 아무리 작게 잡아도 3만명이 넘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정부가 미워도, 가짜 뉴스 퍼뜨리면서 다른 사람들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이런 것 말고도 사용할 수 있는 정쟁의 도구는 많지 않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 사람이 어떤 정치성향을 가졌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집 팔고 사는 단계들

집 팔고, 사는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믿을만한 부동산 중개인을 골라, 집을 내놓는다. 적정한 가격도 중개인과 상의한다. 집의 시세는 중개인이 더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수수료가 주택 가격의 몇 %이기 때문에 중개인이 터무니 없는 가격을 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집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집 구경을 하러 올 때는 집을 비워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매자의 관심을 끌도록 최대한 집안을 잘 정리해 놓는다. 필요한 경우 리모델링을 해 놓기도 한다.

집을 사고 싶은 사람이 게시된 가격과 다른 가격에 사고 싶으면 counter offer를 한다. 여러 명이 동시에 사고 싶어해서 경쟁이 붙으면 처음에 내놓은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계약이 될 수도 있다.

집 주인은 여러 offer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른다. offer된 가격 외에도 구매자의 신용등급이나, 구매자의 구매 열의 등도 고려 대상에 넣어야 한다. 높은 가격을 적어 내고, 시간을 끌다가 최종적으로 구매 계약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낮은 신용 등급 때문에 대출을 받지 못해서 최종 단계에서 구매를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 주인이 offer 를 받아들여 구매 계약을 시작하면, 구매자의 대출 회사에서는 집에 대한 inspection을 요구한다. 구매자는 inspector를 고용해서 집에 대한 검사를 한다. 비용은 구매자가 부담하며 $400에서 $500 정도 든다. inspection 결과에 따라, 추가 수리 요구나 가격 조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다음은 집 가격에 대한 평가 (appraisal)가 필요한데, 구매자의 대출 회사에서 수행한다. 집 가격이 거래 가격보다 높게 평가되면 문제가 없지만, 더 낮게 평가되면 그 가격만큼만 대출이 허용되므로, 부족한 비용은 구매자가 준비해야 한다.

평가가 끝나면, 대출을 위한 기본 준비는 끝이다. 대출회사에서는 집에 대한 보험 증서를 요구한다. homeowners insurance 회사를 찾아서 구매대상 주택에 대한 보험을 구매계약 최종 완료일 기준으로 보험을 미리 구매해서 대출회사에 제출해야 한다.

대출이 확정되면 주택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해야하는데, 이 일을 해주는 곳이 title 회사다. 부동산 중개인과 연계된 곳이 있으니, 그 title 회사를 통해서 소유권 이전을 완료하면 된다.

집을 판매하는 입장에서는 내 집에 대한 구매자의 대출회사에서 시행하는 appraisal이 무사히 끝나면 거의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이다. 구매자가 대출을 무사히 받아 최종구매계약(closing) 시점까지 기다리면 된다.

집을 살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번에는 내가 구매자 입장이 된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집에 대한 사양을 정하고, 가능한 한 많은 집을 둘러보고, 결정한다.

집을 결정했으면, offer를 넣는 것으로 첫 단계를 시작하고, 나머지는 위에 기술한 것과 대동소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