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시도의 후과

불법 비상 계엄으로 육군 특수전 사령부를 포함하여 정보사령부 특임대 등 우리나라 최강의 부대를 동원했다가, 그 사령관들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군장성, 영관급 장교들이 처벌될 위기에 처했다.

인조반정 즈음에 지금의 북만주 지역에는 후금이 등장해서 그 기세를 키워가던 중이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인조반정의 공신 중 하나였던 이괄은 그 북방의 경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반정공신들 간의 알력으로 이괄의 아들이 포함된 역모 의혹 사건이 발생하지만, 조사 후 무고로 밝혀진다. 하지만 이괄을 잡아와 아들의 모반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이괄을 서울로 압송하려 한다.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라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1만여 병력을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는 등 초기에는 꽤 기세를 올렸지만, 곧 전열을 정비한 관군에게 대패하여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북방 수비의 주력군이 무너지고, 반란군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후에 정묘호란 등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말기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보니, 조선의 군사력을 대단치 않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조선 초기나 중기의 조선군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군대가 아니었다. 후금으로서도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기 때문에 두차례 호란에서도 소수병력의 기습으로 한양으로 곧바로 진격하여 왕을 잡고 속전속결로 마무리하려 했다.

만일 이괄의 난이 일어나지 않아서, 북방 수비를 위한 주력군이 유지되었다면, 후금의 입장에서도 쉽게 조선을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론유감1

첫 번째는 친/반/비 란 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2000년대 초반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정치권 사람들을 분류할 때 친/반/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이른바 동교동계, 상도동계 등의 계파로 정치인들을 분류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친노, 비노 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로, 친이계, 친박계라는 말을 거쳐, 친박, 진박, 비박 이란 용어가 만들어져 쓰였다. 친문, 반문, 비문을 지나, 친윤, 반윤, 비윤에다가 친한이란 말도 들어오고, 친명, 비명, 반명까지 그 쓰임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조선시대에도 붕당이라 하여, 남인, 북인 (대북, 소북), 노론 (시파, 벽파), 소론 등이 있었다. 정파와 학파에 따라 나뉘고, 각 당파별로 큰 스승들이 있었다. 그래도 친이이, 반이이, 친이황, 반이황, 친조식, 반조식 등과 같이 정파를 나누지는 않았다.

언어는 생각의 틀을 만들기도 하지만, 생각을 그 틀 안에 가두기도 한다. 전우용 교수의 일갈처럼 민주정(democracy)란 말이 민주주의로 잘못 번역되면서, 왕정이나 공화정 처럼 하나의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민주정이란 말이 무슨 무슨 주의처럼 어떤 신념 체계를 뜻하는 말처럼 인식이 되면서, 믿고 안믿는 신앙의 차원이 되어버렸다. 경제체제를 일컫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상대편에는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적절한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 대신 ‘민주주의’란 말을 상대어로 더 흔히 쓰기 시작하게 된 것도 이런 잘못된 생각의 틀 때문이다.

한 사람의 여러 층위 철학과 인식을 특정인과의 친소로 나누는 이런 저열한 방식은 그렇게 분류된 사람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다. 나의 존재가 어떻게 특정인과 친하거나 또는 소원하거나로 정의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하나 하나가 헌법 기관인 현직 국회의원을 친/반/비로 딱지 붙이는 순간, 그 각자의 존엄함은 사라지고 ‘친’이 지향하는 한 개인의 명령에 무작정 따르는 수동적인 객체로 만들게 된다. 어쩌면 지금 친윤, 비윤, 친한, 친명, 비명 으로 분류되는 개개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친윤의 입장, 친한의 입장, 친명의 입장, 반명의 입장 만이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바라건데, 사람들을 친/반/비 로 구분짓는 일은 그만 멈추어주었으면 한다. 그 사람들이 무슨 모임이라도 만들어 활동한다면 모를까, 언론이 자의적으로 찬/반/비 로 붙여 부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본인의 의사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오늘, 내일의 발언의 내용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찬/반/비 분류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언론의 말장난일 뿐이다.

꼰대

‘꼰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요즘은 그 말의 의미가 확장되어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윗사람으로 아집에 빠져 젊은이들에게 훈수랍시고 자기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끝나고, 88년 서울올림픽을 지나며, 기존의 권위주의적이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X세대로 불리던 우리 세대는 이제 나이들어 이른바 꼰대가 되었다.

막상 꼰대가 되어보니, 꼰대라는 말이 가진 틀의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느낀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입을 떼기가 무섭게 이른바 ‘꼰대짓’으로 입틀막을 당하는 신세라니, 서글프다. 나이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격언이 있던데, 입닥치고 돈이나 내라는 얘기로 들리기에 그 또한 서글프다.

MZ는 MZ라서 그려러니 한다면, X세대는 X세대라거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젊은 사람들 듣기 좋은 말을 해주면 현자로 칭송받고,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는 말이다 싶으면 꼰대로 비난을 받게 되니 너도 나도 입을 닫게 되고, 세대간 대화도 없어지니 그 장벽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요즘처럼, 나이가 벼슬이 아닌 시대에,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하는 ‘꼰대’라는 재갈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첫 직장 명함

90년대 초반에 샀던 책을 다시 꺼내 읽다가 책갈피로 사용했던 반가운 예전 명함을 발견했다. 1994년도 금성사(金星社)에 입사했을 때 받았던 명함.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단어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 흥미롭다. 내 이름은 특별히 한글로 해달라고 부탁했으리라. 대학시절 국어운동학생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고, 나름 한글전용론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權在洛이라는 한문 이름이 써져 있었으리라. 지금이야 한글전용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에 대한 논쟁이 꽤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듬해에 LG전자로 사명이 변경되었으니, 금성사의 마지막 해와 LG전자의 첫 해를 함께 했다. 내 첫 직장이기도 했고, 대학 2년과 대학원 2년의 등록금을 책임져준 고마운 회사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항상 애정을 갖고 있다.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

다시 리영희.

친위쿠데타가 벌어졌던 한국이나,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이나, 세상은 한치 앞이 안보일 정도로 혼란스럽다. 신경을 빠짝 세운 채로 한 두달이 넘어가니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이러다가는 내란 수괴와 그 동조자들보다 내가 먼저 나가 떨어질 것 같다.

20여년 전에 읽었던 <데이비드 보더니스>가 쓴 <E=mc2>이란 책을 다시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이 통찰에까지 오게된 이야기를 읽다보면 세상 일에 찌든 내 머리도 좀 쉬어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였는데,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이 이런 통찰에 도달할 수 있게되기 까지 기여한 과학자들의 드라마같은 삶. 그리고, 질량은 그것의 광속의 제곱만큼의 배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원자 폭탄. 나치독일과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얽인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어쩌면 머리를 식히는 책으로 적당한 책은 아니었다.

내 방 책꽂이 앞에 서서 무얼 다시 읽을까하다가 <리영희>교수의 <자유인>을 꺼내들었다. 1990년에 출간되었으니 이제는 35년 전이다. 1987년 6.10 항쟁을 통해 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이를 통해 군부독재를 몰아내기는 커녕 전두환의 친구로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중 하나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 리영희 교수는 그 절망 속에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세상에 던져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1988년 월간중앙 12월호에 실린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라는 글은 광복 43년이란 부분을 빼면 마치 어제 쓴 글처럼 시의적절하고 살아있다. 이 글에 인용된 중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노신의 1925년 작품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에는 세 가지 종류의 ‘물에 빠진 개’가 나온다. (1) 자기 실수로 빠진 개, (2) 남이 때려 빠뜨린 개, (3) 내가 때려 물 속에 처박은 개. 이 중에 자신이 맞붙어 싸워 물에 처넣은 개라면 물에 빠진 개를 몽둥이로 힘껏 때린다고 해서 너무하다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사람을 문 개는 뭍에 있거나 물 속에 빠졌거나 모조리 몽둥이질을 해서 혼을 내야 한다”는 것.

“광복 직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집단을 숙정하지 못한 까닭에 이 국민은 단독정권 수립, 민족분단, 영속적인 독재정권 체제 하에 신음해야 했다. <<중략>> 국민이 해야할 일은 민주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들은 잠시 물에 처넣어졌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어설픈 ‘관용론’과 ‘보복불가론’에 힘입어 국면이 바뀌기만 하면 그들은 물에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덤빌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페어플레이는 좋다. 그러나 그것은 페어플레이의 정신을 이해하고 행동할 줄 아는 상대에 대해서만 적용될 미덕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기를 확립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 모른다. 민주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새해

새해가 밝았다. 한국의 상황은 여전히 어지럽다. 다행히 내란 수괴가 체포되고, 구속되어 한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폭도들이 법원을 습격하고 판사를 공격하려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오래동안 성심 성의껏 준비해온 과제 제안서가 최종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오래동안 준비했던 것이라 실망이 너무 크다. 어떻게 이 상심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시간이 어느 정도는 해결해 주겠지… 기다려 보자.

준비했던 계획은 큰 뼈대하나가 부러져버렸다. 앞으로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번 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마음을 추스리는데 전념하자.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는 좀 더 명확한 방법론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내가 모자란 탓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동안 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주 심호흡하고, 좀 더 자주 쉬어가고, 좀 더 자주 나를 돌아보자.

보수의 위기인가 기회인가

친위쿠데타 실패로 인해, 현직 대통령이 탄핵 소추될 처지가 되자, 보수의 소멸,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보수가 소멸 위기에 빠진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보수가 새롭게 태어날 기회가 되었다 말하고 싶다.

흔히 보수정당의 뿌리로 이승만의 자유당을 생각하는데,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만든 민주공화당이 그 뿌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4.19혁명으로 역사적 심판을 받고 사라진 당을 자신들의 뿌리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긴 하다. 그 이후,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삼당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다가 현재의 국민의 힘까지 이르고 있다. 김영삼을 시작으로 소위 문민정부가 되면서 애초의 군사반란 세력의 당이라는 색채가 많이 옅어지긴 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이 뿌리라고 생각하는 정당은 4.19 혁명으로 새롭게 세워진 장면 내각의 민주당이다. 이 민주당은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 보수 우익 정당이었다. 자유당 탈당파를 포함한 여러 계파가 모여서 창당한 당이며, 이승만 정부 하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던 조봉암을 ‘사상이 의심스럽다’면서 배제할만큼 보수 우익 정당이었다. 5.16쿠테타로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해산당했다.

더불어민주당이 건강한 보수정당을 자리에 위치하게되고, 국민의 힘과 같은 내란동조 세력은 소수 정당이 되는 날, 우리에게도 진정한 의미의 진보 정당이 나타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적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처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국정의 한 축으로 존재하는 한, 진보와 보수의 건강한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민주당이 진정한 의미의 보수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보수가 재탄생하는 일이니, 이번 탄핵이 완성되면 보수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보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일기장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즈음이다. 박사학위를 무사히 받고, 직장을 잡아 미시간으로 이사를 하고, 안정을 잡아가던 시기였는데, 그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힘들 때였던 것 같다. 나를 힘들게 했던 이유는 그 이후 차차 알아가게 되었다. 어쩌면 일기를 쓰게 된 이유도 이것과 연관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때 5학년 때였던가, 이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무렵에 썼던 일기장을 나중에 부끄러운 마음에 대부분을 찢어버렸다. 한 동안 쓰지 않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고, 꾸준히는 아니지만, 가끔씩이라도 일기를 끄적거렸던 것은 대학교 다닐 때까지 였던 것 같다.

제일 왼쪽부터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 일기장. “크지 않는 고독”이란 일기장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열쇠도 없거니와, 열어볼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서는 결혼 생활, 회사 생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광풍이 몰아치는 동안에는 개인 웹사이트를 만들어, 일상을 끄적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종이 일기를 다시 써야지 했던 것은 아마도, 웹사이트 자료라는 게 장기간 유지/보수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것과, 그 무렵 시작한 손가락 관절염 때문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관절염이 더욱 악화될 것 같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키보드 작업을 줄여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기 쓰기가 이제 10여년이 넘어가고 있고, 그동안 모아놓은 일기장이 꽤 많은 분량이 되었다. 대부분이 일상의 단상과 넋두리, 또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지만, 뚜렷하지 않은 생각을 글로 옮겨본다는 것이 여러가지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나서는, 부끄러워서 다시 펼쳐서 읽어보지는 못할지라도 계속 끄적여 나가고 있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형식의 공책. 매일 휴대해야 하다보니, 두꺼운 것보다는 얇은 것, 그리고, 스프링으로 철이 되어 있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해서, 최근에는 단순하고, 작은 것을 이용하고 있다.

일기라는 게 생각의 쓰레기통 같은 것이라, 버리고나면, 열어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얕고, 사악하고, 부끄러운 생각의 쓰레기들이 썩어가며 악취를 풍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그 중 일부라도 발효된 놈들이 남아 있을까하여, 일단은 서랍 깊숙히 보관하고 있다.

국적회복

여권 신청

3월 8일에 여권 신청을 위해 시카고에 다녀왔다.

일반적인 여권 신청 서류에 추가해서 두 가지 서류가 더 필요했다.

  1. 국적회복 증서 (사본)
  2. 외국국적불행사 서약서 (사본)

사진은 영사관 내부에 설치된 사진기로 그 자리에서 무료로 찍을 수가 있었다.

여권 도착

4월 8일에, 마침내 우편으로 여권을 받았다. 2021년 말에 시작한 국적회복 신청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간다. 지난 12월 1일에 국적회복 확인 서류 받고, 다시 2024년 3월 8일에 여권을 신청했고, 한달여 만에 여권을 받았다.

이제 한국 방문해서 주민등록 신고만 하면 모든 단계가 마무리된다. 미국국적 획득으로 잃게되었던 한국 국적을 다시 찾게되니, 기쁘다. 이제 다시 공식적으로 한국인.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게되었다. 한국에 작게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10년 만의 재수술

    2013년에 축농증 수술 받은 후, 10년 만에 재수술을 받았다. 워낙 재발이 잘 된다고들 했는데, 괜찮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으로 관리를 소홀히 한 면도 있다. 수술비용도 그렇고, 회복 과정도 쉽지가 않다. 앞으로는 잘 관리해서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기로 하자.

    전에는 콧속의 물혹만 제거 했었는데, 이번에는 비중격 성형술(Septoplasty)도 함께 받았다. 콧 속의 물렁뼈가 콧속 염증이나 물혹등의 이유로 휘어져서 코를 통한 공기의 흐름이 원할하지 않게 되는데, 이를 교정해주는 수술이다.

    기능성 내시경 부비동 수술(Functional Endoscopic Sinus Surgery)과 비갑개 점막하 절제술(Submucosal Resection of Nasal Turbinates)도 함께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