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타국생활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도 좁고, 접하는 매체도 다양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눌 기회도 자주 없다보니 나이들면서는 나만의 생각에 더 깊이 빠지게 되면서 생기게 될 아집이 걱정되었다.

우연한 다른 기회를 통해 알게된 분들과 조촐하게 독서모임을 시작하게 된 것이 2019년이다. 매달 하기로 했지만, 책이 두꺼워 여러 달로 나눠하게 된 경우도 있고, 다른 이유로 미뤄지는 경우도 있어 몇 달에 한 번 하게 된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와 어느새 만 6년이 되었다.

책의 주제는 어떤 것이든 순차가 돌아온 사람이 정하는 것으로 해서, 특정한 분야에 매몰되지 않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함께 읽게 되었다. 빠진 책들이 더러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 읽은 책들을 분야별로 정리해보았다. 다른 분들이 추천해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을 책들이 많다. 좋은 책들을 추천해주신 모임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 책들을 읽고 더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더 넓은 사람이 되었다면 모두 이 책들 덕분이다.

1️⃣ 과학 · 기술 · 자연철학

  • Energy and Civilization: A History — Vaclav Smil
  • E = mc² — 데이비드 보더니스
  • QED: The Strange Theory of Light and Matter — Richard Feynman
  • Quantum Chance: Nonlocality, Teleportation and Other Quantum Marvels — Nicolas Gisin
  • The Selfish Gene — Richard Dawkins
  • The Vital Question — Nick Lane
  • Factfulness — Hans Rosling, Ola Rosling, Anna Rosling Rönnlund
  • Pandemic: Tracking Contagions, from Cholera to Coronaviruses and Beyond — Sonia Shah

2️⃣ 철학 · 과학철학 · 인지

  • How to Create a Mind — Ray Kurzweil
  • Free Will — Sam Harris
  • What Money Can’t Buy — Michael J. Sandel
  • 과학, 철학을 만나다 — 장하석
  •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니콜라스 카

3️⃣ 역사 · 문명 · 세계사

  • Sapiens — Yuval Noah Harari
  •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 Howard Zinn
  • Korean Sketches — James S. Gale
  • Japan and the Shackles of the Past — Taggart Murphy
  •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라시드 할리디

4️⃣ 정치 · 국제관계 · 권력

  • The Narrow Corridor: States, Societies, and the Fate of Liberty — Daron Acemoglu & James A. Robinson
  • How to Lose a Country — Ece Temelkuran
  • The Kingdom, the Power, and the Glory — Tim Alberta
  • China’s Gilded Age: The Paradox of Economic Boom and Vast Corruption — Yuen Yuen Ang
  • 제국과 의로운 민족 — Odd Arne Westad
  •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 김동기

5️⃣ 경제 · 사회 · 불평등

  • Scarcity — Sendhil Mullainathan & Eldar Shafir
  • The Common Good — Robert Reich
  • 불평등의 세대 — 이철승
  • 한국의 능력주의 — 박권일
  • 쓸모있는 경제학 — 이완배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오찬호
  • White Fragility — Robin DiAngelo

6️⃣ 인문 에세이 · 비평 · 지식 교양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 채사장
  • 담론 — 신영복
  • 국경일기 — 정문태
  • 열흘짜리 배낭여행 — 김유경

7️⃣ 문학 (소설 · 서사)

  • Hunger — Knut Hamsun
  • 페스트 — 알베르 카뮈
  • 소년이 온다 — 한강
  •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배크만

8️⃣ 법 · 정의 · 사회비판

  • 디케의 눈물 — 조국
  • 법고전 산책 — 조국
  • 죄수와 검사: 죄수들이 쓴 공소장 — 심인보 외

안식년 준비

내년 1월부터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2020년 1월에 학교를 옮겼으니, 내년 1월이 지금 있는 학교에서 일을 시작한 지 만 5년이 지나고 6년째가 시작되는 달이다. 교칙에 따르면, 6년째에 안식년을 가질 수 있다고 하니, 가장 이르게 안식년을 가질 수 있는 학기가 내년 1월에 시작하는 학기가 된다. 보통은 가을학기에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여름방학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5월부터 시작해서 다음 해 8월까지 16개월을 연속으로 수업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1월에 시작한 경우에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가 없다. 애초에 이렇게 계획하게 된 이유는 한국 정부 의 Brain Pool이라는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연구비를 받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지만, 안타깝께도 제안서가 채택이 되지 않는 바람에 이런 애초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안식년 일정도 좀 꼬이게 되었다.

아무튼, 이미 이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고, 그것에 따라서 다른 계획들도 수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다만, 안식년 동안에 1년간 수입이 절반으로 줄기 때문에 다른 안정적인 수입처를 찾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일단은 한양대에서 봄학기와 가을학기에 대학원 과목을 각각 하나씩 가르치기로 했고, 그 외에 아직 다른 계획은 없다. 좀 염치없지만, 안면이 있는 다른 회사들에도 좀 연락을 해봐야겠다. 마침 다음 주가 추수감사절 휴가로 1주일간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데, 그 때를 이용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보도록 하자.

이재명 대통령 당선

이재명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다.

영구집권의 헛된 꿈을 꾸던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를 오직 헌법의 힘으로, 주권자의 힘으로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민주 공화국을 지켜낼 수 있어 정말 기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란당에서 나온 후보가 41%넘는 득표를 하고, 🐶 쓰레기 후보가 8%가 넘는 표를 얻어, 이 둘의 합이 1위 후보보다 많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하다.

내란의 밤에서 오늘 선거까지 오는 민주 공화국을 지켜낼 수 있는 길. 그 길이 돌이켜보면, 위험하고 좁디 좁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반발짝만 잘못디뎠어도 민주 공화국은 종말의 천길 낭떨어지로 추락했을 것이다.

복 받은 나라다. 우리나라 만세.

다시 부교수

5월 15일에 열린 Board of Regents 회의에서 2025-2026학기에 승진 후보들에 대해 최종적으로 승인이 이루어졌다. 이제 공식적으로 2025년도 가을 학기부터 Associate Professor with Tenure (부교수 – 정년보장)가 된다. 다들 별 문제 없을 것이라 했지만, 그래도 당사자는 심사기간 동안 마음을 졸일 수 밖에는 없는 일. 이제 큰 걱정 하나는 덜었다.

Kettering 대학에서 10여년을 보낸 부교수 3년차에 다시 조교수 자리에 지원해 자리를 옮기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뭔가 좀 더 깊이있고, 의미있는 연구를 해보고싶다는 개인적인 욕구가 있었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 박사과정이 있는 주립대를 목표로 다시 지원을 시작했다. 플로리다 대학과 전화 인터뷰까지는 갔는데 잘 안되었고, 그러던 중, 미시간대학-디어본에서 로보틱스 분야 조교수 모집 공고를 보게되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 지원해놓고 보자는 마음으로 지원을 했다.

조교수 채용하는 자리에 부교수 3년차가 지원했으니, 아마도 처음에 걸러졌으리라. 하지만 아마도 최종 후보자들 중에서 학교의 offer를 받은 사람이 없었는지, 내게 연락이 왔다. 조금 미심쩍은 투로, 이 자리가 조교수 뽑는 자리인데, 정말 올 생각이 있는지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이틀 정도 고민을 하다가, 조교수 자리라도 새로 시작해 보겠다는 이메일 답장을 보내고, on-site interview를 거쳐서 offer를 받았다. 2019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하는 자리였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2020년 겨울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계약을 했다.

새로 연구실을 만들고, 연구분야도 다시 정립해야 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5년 안에 성과를 내야하는 조건이었다. 정년심사는 원래 6년차에 하는 것이지만, 내 경력을 고려해줘서 5년차에 할 수 있게 계약을 했다. 다만 가을학기 대신 겨울학기에 시작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5.5년차에 지원하게 되었다.

2020년 겨울학기에 시작된 Covid 때문에 학교가 모두 online 체제로 바뀌고, 학교 출입과 연구실 사용이 엄격히 통제, 관리되는 바람에 초창기 연구실 만드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과제 제안서 쓰느 일도 익숙한 것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하나씩 배워나가야 했다.

돌이켜보면 운도 따라주었고, 한양대의 남해운 교수와, 지금 학교의 선배, 동료 교수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모든 분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전하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닿는대로 짧게라도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방문교수로 시작해서 조교수, 부교수, 다시 조교수의 길. 이렇게 15년을 보내고서 다시 부교수가 되었다. 정교수가 되는 걸 목표로 달려가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열심히 재밌게 연구하다보면 또 기회가 오겠지. 굽이 굽이 참 많이도 돌아가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 모든 순간도 내 삶이니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넘어가니, 몸의 이곳 저곳에서 못살겠다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좋을 때, 잘 유지하고, 이 상태라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더 재미있는 연구 분야를 찾아보자. 이제부터는 해야할 일 보다는 하고 싶은 일, 내가 더 재미를 느끼는 일에 시간을 좀 더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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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시도의 후과

불법 비상 계엄으로 육군 특수전 사령부를 포함하여 정보사령부 특임대 등 우리나라 최강의 부대를 동원했다가, 그 사령관들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군장성, 영관급 장교들이 처벌될 위기에 처했다.

인조반정 즈음에 지금의 북만주 지역에는 후금이 등장해서 그 기세를 키워가던 중이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인조반정의 공신 중 하나였던 이괄은 그 북방의 경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반정공신들 간의 알력으로 이괄의 아들이 포함된 역모 의혹 사건이 발생하지만, 조사 후 무고로 밝혀진다. 하지만 이괄을 잡아와 아들의 모반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이괄을 서울로 압송하려 한다.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라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1만여 병력을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는 등 초기에는 꽤 기세를 올렸지만, 곧 전열을 정비한 관군에게 대패하여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북방 수비의 주력군이 무너지고, 반란군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후에 정묘호란 등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말기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보니, 조선의 군사력을 대단치 않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조선 초기나 중기의 조선군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군대가 아니었다. 후금으로서도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기 때문에 두차례 호란에서도 소수병력의 기습으로 한양으로 곧바로 진격하여 왕을 잡고 속전속결로 마무리하려 했다.

만일 이괄의 난이 일어나지 않아서, 북방 수비를 위한 주력군이 유지되었다면, 후금의 입장에서도 쉽게 조선을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론유감1

첫 번째는 친/반/비 란 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2000년대 초반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정치권 사람들을 분류할 때 친/반/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이른바 동교동계, 상도동계 등의 계파로 정치인들을 분류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친노, 비노 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로, 친이계, 친박계라는 말을 거쳐, 친박, 진박, 비박 이란 용어가 만들어져 쓰였다. 친문, 반문, 비문을 지나, 친윤, 반윤, 비윤에다가 친한이란 말도 들어오고, 친명, 비명, 반명까지 그 쓰임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조선시대에도 붕당이라 하여, 남인, 북인 (대북, 소북), 노론 (시파, 벽파), 소론 등이 있었다. 정파와 학파에 따라 나뉘고, 각 당파별로 큰 스승들이 있었다. 그래도 친이이, 반이이, 친이황, 반이황, 친조식, 반조식 등과 같이 정파를 나누지는 않았다.

언어는 생각의 틀을 만들기도 하지만, 생각을 그 틀 안에 가두기도 한다. 전우용 교수의 일갈처럼 민주정(democracy)란 말이 민주주의로 잘못 번역되면서, 왕정이나 공화정 처럼 하나의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민주정이란 말이 무슨 무슨 주의처럼 어떤 신념 체계를 뜻하는 말처럼 인식이 되면서, 믿고 안믿는 신앙의 차원이 되어버렸다. 경제체제를 일컫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상대편에는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적절한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 대신 ‘민주주의’란 말을 상대어로 더 흔히 쓰기 시작하게 된 것도 이런 잘못된 생각의 틀 때문이다.

한 사람의 여러 층위 철학과 인식을 특정인과의 친소로 나누는 이런 저열한 방식은 그렇게 분류된 사람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다. 나의 존재가 어떻게 특정인과 친하거나 또는 소원하거나로 정의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하나 하나가 헌법 기관인 현직 국회의원을 친/반/비로 딱지 붙이는 순간, 그 각자의 존엄함은 사라지고 ‘친’이 지향하는 한 개인의 명령에 무작정 따르는 수동적인 객체로 만들게 된다. 어쩌면 지금 친윤, 비윤, 친한, 친명, 비명 으로 분류되는 개개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친윤의 입장, 친한의 입장, 친명의 입장, 반명의 입장 만이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바라건데, 사람들을 친/반/비 로 구분짓는 일은 그만 멈추어주었으면 한다. 그 사람들이 무슨 모임이라도 만들어 활동한다면 모를까, 언론이 자의적으로 찬/반/비 로 붙여 부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본인의 의사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오늘, 내일의 발언의 내용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찬/반/비 분류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언론의 말장난일 뿐이다.

꼰대

‘꼰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요즘은 그 말의 의미가 확장되어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윗사람으로 아집에 빠져 젊은이들에게 훈수랍시고 자기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끝나고, 88년 서울올림픽을 지나며, 기존의 권위주의적이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X세대로 불리던 우리 세대는 이제 나이들어 이른바 꼰대가 되었다.

막상 꼰대가 되어보니, 꼰대라는 말이 가진 틀의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느낀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입을 떼기가 무섭게 이른바 ‘꼰대짓’으로 입틀막을 당하는 신세라니, 서글프다. 나이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격언이 있던데, 입닥치고 돈이나 내라는 얘기로 들리기에 그 또한 서글프다.

MZ는 MZ라서 그려러니 한다면, X세대는 X세대라거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젊은 사람들 듣기 좋은 말을 해주면 현자로 칭송받고,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는 말이다 싶으면 꼰대로 비난을 받게 되니 너도 나도 입을 닫게 되고, 세대간 대화도 없어지니 그 장벽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요즘처럼, 나이가 벼슬이 아닌 시대에,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하는 ‘꼰대’라는 재갈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첫 직장 명함

90년대 초반에 샀던 책을 다시 꺼내 읽다가 책갈피로 사용했던 반가운 예전 명함을 발견했다. 1994년도 금성사(金星社)에 입사했을 때 받았던 명함.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단어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 흥미롭다. 내 이름은 특별히 한글로 해달라고 부탁했으리라. 대학시절 국어운동학생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고, 나름 한글전용론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權在洛이라는 한문 이름이 써져 있었으리라. 지금이야 한글전용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에 대한 논쟁이 꽤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듬해에 LG전자로 사명이 변경되었으니, 금성사의 마지막 해와 LG전자의 첫 해를 함께 했다. 내 첫 직장이기도 했고, 대학 2년과 대학원 2년의 등록금을 책임져준 고마운 회사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항상 애정을 갖고 있다.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

다시 리영희.

친위쿠데타가 벌어졌던 한국이나,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이나, 세상은 한치 앞이 안보일 정도로 혼란스럽다. 신경을 빠짝 세운 채로 한 두달이 넘어가니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이러다가는 내란 수괴와 그 동조자들보다 내가 먼저 나가 떨어질 것 같다.

20여년 전에 읽었던 <데이비드 보더니스>가 쓴 <E=mc2>이란 책을 다시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이 통찰에까지 오게된 이야기를 읽다보면 세상 일에 찌든 내 머리도 좀 쉬어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였는데,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이 이런 통찰에 도달할 수 있게되기 까지 기여한 과학자들의 드라마같은 삶. 그리고, 질량은 그것의 광속의 제곱만큼의 배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원자 폭탄. 나치독일과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얽인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어쩌면 머리를 식히는 책으로 적당한 책은 아니었다.

내 방 책꽂이 앞에 서서 무얼 다시 읽을까하다가 <리영희>교수의 <자유인>을 꺼내들었다. 1990년에 출간되었으니 이제는 35년 전이다. 1987년 6.10 항쟁을 통해 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이를 통해 군부독재를 몰아내기는 커녕 전두환의 친구로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중 하나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 리영희 교수는 그 절망 속에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세상에 던져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1988년 월간중앙 12월호에 실린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라는 글은 광복 43년이란 부분을 빼면 마치 어제 쓴 글처럼 시의적절하고 살아있다. 이 글에 인용된 중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노신의 1925년 작품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에는 세 가지 종류의 ‘물에 빠진 개’가 나온다. (1) 자기 실수로 빠진 개, (2) 남이 때려 빠뜨린 개, (3) 내가 때려 물 속에 처박은 개. 이 중에 자신이 맞붙어 싸워 물에 처넣은 개라면 물에 빠진 개를 몽둥이로 힘껏 때린다고 해서 너무하다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사람을 문 개는 뭍에 있거나 물 속에 빠졌거나 모조리 몽둥이질을 해서 혼을 내야 한다”는 것.

“광복 직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집단을 숙정하지 못한 까닭에 이 국민은 단독정권 수립, 민족분단, 영속적인 독재정권 체제 하에 신음해야 했다. <<중략>> 국민이 해야할 일은 민주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들은 잠시 물에 처넣어졌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어설픈 ‘관용론’과 ‘보복불가론’에 힘입어 국면이 바뀌기만 하면 그들은 물에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덤빌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페어플레이는 좋다. 그러나 그것은 페어플레이의 정신을 이해하고 행동할 줄 아는 상대에 대해서만 적용될 미덕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기를 확립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 모른다. 민주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새해

새해가 밝았다. 한국의 상황은 여전히 어지럽다. 다행히 내란 수괴가 체포되고, 구속되어 한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폭도들이 법원을 습격하고 판사를 공격하려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오래동안 성심 성의껏 준비해온 과제 제안서가 최종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오래동안 준비했던 것이라 실망이 너무 크다. 어떻게 이 상심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시간이 어느 정도는 해결해 주겠지… 기다려 보자.

준비했던 계획은 큰 뼈대하나가 부러져버렸다. 앞으로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번 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마음을 추스리는데 전념하자.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는 좀 더 명확한 방법론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내가 모자란 탓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동안 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주 심호흡하고, 좀 더 자주 쉬어가고, 좀 더 자주 나를 돌아보자.